샤넬 의 제2도전
2009.7.17.금
[브랜드 히스토리 1화] 샤넬 - CHANEL
샤넬-CHANEL
세상에는 수많은 '명품'이라는 가치를 지닌 브랜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패션 브랜드에서도 명품은 존재합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시작하여 지금 21세기까지 무려 한세기 동안 전세계를 매료시키고 10대에서 부터 나이든 모든
여성들을 열광시킨 브랜드가 있습니다. 고급스러움이라는 단어를 옷으로 표현하고 여성에게 옷으로 현대적인 미와
여성으로써의 아름다움을 선물해준 브랜드. 바로 샤넬입니다.그러나 현대에 와서 명품을 바라보는 시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 명품의 이미지는 수십, 길게는 수백년동안 가문대대로 내려져온 기술을 전수받은 장인이
모든것을 바쳐 훌륭한 명품을 생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명품들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진정한
명품으로써의 가치를 다했습니다. 지금의 명품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관점이었죠.. 지금의 명품은 그저 값만
비싸고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사치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현대에와서 상업성의 비중이커졌기
때문이겠죠.하지만 명품도 명품 나름입니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뒤 광고를 통한 이미지 조작이 계속된다하더라도
세대와 시대를 넘나드는수많은 여성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샤넬은 진정한
명품이 될 수있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샤넬이 만들어내는 명품으로써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우선 샤넬의 가치를 찾아낼려면 코코 샤넬의 삶을 먼저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1883년 8월 19일 훗날
코코(Coco)샤넬이라 불리게 될 가브리엘 샤넬(Gabriel Bouheur Chanel)이 구호소 한쪽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그녀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상황이 너무 안좋았기 때문에 제대로된 조산원이 아닌 구호소에서 샤넬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열두 살에 그녀의 어머니는 가난으로 인한 결핵으로 세상을 뜨게되고 그녀의 무책임한 아버지는
그녀를 수도원의 고아원에 맡겨버리고 사라집니다. 그후로 그녀는 아버지를 두번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고 이때부터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몽유병을 앓으며 생각하기도 싫은 유년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나 수녀들을 보며 무의식중에 영감을 얻게되며 그 당시에는 없었던 충격적인 옷을 만들어내게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18세 이후 고아원에서 나온 그녀는 의지할 곳 없이 하류인생을 살게 됩니다. 낮에는 양재 보조로,
밤에는 싸구려 바에서 댄서와 가수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그녀는 자주 불렀던 노래 때문에 샤넬 코코라는
애칭을 얻게됩니다. 그런데 그녀는 우연히도 바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게 됩니다. 하류 인생의 가수생활을 하던
그녀의 앞에 에띠엔느 발상이라는기병대장교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어린시절 자신의 가난하고 지독했던 인생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매력으로 에띠엔느 발상을 매료시켰고 그의 도움으로 상류층에 올라 갈 수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띠엔느는 그녀를 자신의 별장에 두고 그녀에게 상류 사회로 진입하는데 필요한 매너와 교양을
익혔습니다. 그녀는 그때 이곳에서 승마도 배웠는데, 이때 남성용 승마바지를 개조해 입고나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샤넬은 남성복을 모티브로 여성복에도 남성복만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스타일을 창조해내었습니다.
그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조차 불가능했던 상황입니다. 그뒤로 에띠엔느의 지원을 받으며 조그만 모자가게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됩니다. 후에 그녀는 프랑스 북부 해안의 되빌로 이주한뒤에 구땅비통이라는 거리에 작은 옷가게를 열고
본격적인 패션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샤넬은 '되빌룩'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1920년대를 '되빌시대'라
부를정도로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이 되빌룩은 이전까지 남자들의 속옷에나 사용되었던 저지 소재를 본격적으로
여성복에 사용하거나, 늘어진 진주목걸이, 그을린 피부를 패션의 중요한 요소로 만듬으로써 새로운 패션을 이룩하게
됩니다. 1923년 미국의 패션잡지 <<바자(Bazar)>>는 되빌룩에 대해 소개하므로써 이를 계기로 전세계적인
디자이너로써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리고 1차세계대전이 유럽에 퍼진뒤에 그녀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게됩니다. 전쟁으로 프랑스의 남자들은 전부
전쟁터로 떠났고 공장과 회사에서는 여성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당시의 프랑스 여성들의 복장은 쉽게 예를 들자면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여자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입고 있던 치렁치렁거리는 커다란 치마와 드레스, 속에는
코르셋을 껴입은, 활동하기에 불편하기 짝이없는 복장이었습니다. 그러한 복장이 공장에서는 쓸모가 없다는걸
알아차린 샤넬은 자신의 미적 감각을 곁들여 여성들에게 새로운 옷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당시 남성들의 속옷에
사용했던 저지 소재를 여성복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일하는 여성들을 위하여 헐렁하고 자유로우며 유연성이
뛰어난 옷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무릎 밑으로 5~10cm정도 내려오는 이른바 '튜브라인'의 스커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들의 맨다리를 드러낸 옷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전에 어느시대에도
존재하지 않던 여성의 해방과 자유를 상징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뒤에도 여성들의 스타일은
이대로 유지된채 패션디자이너로서 샤넬의 이름을 사회적으로 공고해지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 후, 샤넬은 실용성의 문제를 구체적인 패션 원리로 언급하게 됩니다. "화려함이란 심플한 요소를 눈에
띄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말은 단지 자신의 패션을 설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조형성에 대한 당시의 미학적
이해를 한마디로 정리한 듯합니다. " 거리에서는 평범해 보이고, 맥심(파리의 레스토랑)에선 최고의 찬사를 받는
디자인을 하겠다"는 말 역시 상당한 미학적 깊이를 담고 있습니다.이러한 그녀의 실용적 디자인관으로 그녀의 옷에는
손을 집어넣을 수 있을정도의 주머니가 반드시 들어가고, 모든 단추는 단춧구멍이 따랐습니다. 뭐하나 폼으로
하는것이 없었던 것이지요.이렇게 그녀는 실용성을 추구하며 거기서 파생된 스타일 소위 '샤넬 스타일'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며 현대 패션의 혁명을 주도해 나갔습니다.1차 세계대전후로 샤넬은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 알렸습니다.
어릴적 그녀의 불행한 삶은 오히려 부유한 계층들이 가지고 있던 인습이나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옷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으며 옷을 단순히 겉치래 장식이 아닌 실용성에 입각한 편리하고 아름다운 옷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차세계대전 이후의 혼란과 혁신이 난무하던 시기는 샤넬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것 입니다.
샤넬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며 마릴린 먼로가 입고 잤다는 '샤넬 No.5', 1926년에는 블랙 원피스를 출시 하게 됩니다.
이 블랙 원피스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칼라 였습니다. 당시에 블랙으로 된 옷은 장례식날에만
입는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와서야 별거 아닌일 같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뒤1930년대 샤넬의 부티크는 유럽,남미,미국,중동 등에서 약 2만5천 벌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고, 그녀는
4천명의 직원을 두게 됩니다.작가 모리스삭은 "샤넬은 이전에 파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여성상을 창조했다.
그녀의 영향은 단순히 패션뿐 아니라 정치인과 문인들에게 더할 수 없는 자극이 되었다. 그녀는 새로운 정신을
창조했으며,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전설을 만들었다"라고 샤넬의 전성기를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밌는 사실은
그녀 자신의 그당시의 패션 아이콘이 되어 그녀가 입는 옷이나 헤어스타일을 모든 사람들이 따라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을 후로 그녀의 삶은 하락세로 접어듭니다.. 그녀의 잘못된 사랑이 문제였었습니다.2차 세계대전까지
그녀는 많은 명사들과 사랑을 나누다 실패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중 나치 장교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의 미래는 뒤틀리게 됩니다. 샤넬은 너무나도 사랑에 빠진 나머지 자신의 본분을 잊고 '모델의 모자'라는
암호명으로 나치의 스파이 활동을 하는데까지 이르게 됩니다.2차 세계대전이 끝난뒤로 샤넬은 자신의 과오로 인하여
스위스로 도피했고, 이후 15년 동안 외부와 인연을 끊고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세계를 이끌던 최고의
디자이너에게는 너무나도 큰 비극이었을 것 입니다. 그녀는 패션 디자인계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기나긴 시련의 시간을
홀로 보내게 됩니다.
그녀가 패션계에 다시 복귀한 것은 1954년. 그녀의 과오로 프랑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는 힘들었지만 그녀는
15년간 폐점했던 자신의 부티크를 다시 열고 다시 제2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의 나이 71세 였습니다.
1954년 2월 5일, 샤넬의 첫 복귀 컬렉션이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이 궁굼해 하였습니다.. 15년이라는 긴공백동안 그녀의
디자인은 녹슬었을까, 71세라는 나이로 과연 디자인을 만들어낼수 있을까. 하지만 역시 샤넬은 샤넬답게 다시
일어섰습니다. 복귀한 샤넬은 장식 끈을 단 트위드 투피스를 선보였고 이것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둠으로써 샤넬의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너나 할 것없이 앞다퉈
샤넬 상표만 붙어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입할라고 하였습니다. 일흔이 넘어 복귀한 샤넬은 자신의 모든 경험을
디자인에 담아내며 왕성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저지와 트위드 소재의 슈트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인조 보석과
진주로 만든 액세서리는 모두 이때 그녀가 디자인한 것입니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샤넬은 직접 가게에 나가
디자인 마감까지 살필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미국, 영국, 러시아 등지를 넘나들며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열정뒤에는 외로움이 그녀를 따라 다녔고 아이를 못 낳았다는 콤플렉스 또한 그녀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유년기부터 시작된 몽유병 때문에 샤넬은 자신의 몸을 침대에 묶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합니다.샤넬이 복귀를
하게된 가장 큰 계기는 외로움이 었던것 같습니다. 1949년 폴 모랑에게 쓴 편지에서 샤넬은 "내가 홀로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고독이 나의 성격을 물들이고 자랑스러운 나의 영혼을 청동빛으로 만들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1971년, 샤넬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모르핀에 취한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87세였습니다.
샤넬이 주도한 복식 혁명은 20세기 초반의 혁명적인 시대 분위기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능주의의 확립과 샤넬의
개인적인 취향의 총체적인 결과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샤넬은 자신의 두손과 머리로 20세기의 패션을 만들어내고
지금까지도 패션계에는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변혁의 시대에서 꿋꿋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패션의 정의를 바꾸었던 그녀는 디자이너로서는 물론이고 전세계를 바꾼 인간으로서도 존경받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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