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Gallery

Jean Michel Basquist

Joen_Blue 2005. 10. 13. 12:09

 

28세의 나이에 마약중독으로 생을 마감한 낙서화가 바스키야.

그의 그림을 보면 나는 자유를 느낀다.

제 안의 것을 가능한 모든 평면에 풀어냈던 바스키야,

그를 억압한 것은 무엇이었고

그 안의 자유는 얼마나 큰 형체였기에

스물여덟의 나이조차 감당치 못하고 사라졌을까.

바스키야는 회계사 아버지를 둔 중산층에 태어났으나

빈민가에서 널빤지를 깔고 생활한 흑인 화가다.

그림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했고,

살아 있다면 서른여덟이 되었을 사람.

기자가 바스키야에게 물었다.

"그림 안에 있는 이 글을 해석해주시겠소?"

"해석이요? 그냥 글자예요."

"압니다. 어디서 따온 겁니까?"

"모르겠어요. 음악가에게 음표는 어디서 따오는지 물어보세요. 당신은 어디서 말을 따옵니까?"

- <그림 읽어주는 여자 中 > -

지미 베스트, 1981, 244X244cm :
금속판넬 위에 스프레이페인트와 유성크레용

무제, 1981, 61X51cm :
나무판넬위에 아크릴릭, 유성크레용,종이 꼴라쥬

무제, 1982, 244X244 :
십자모양 프레임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과 유성크레용

트렁크, 1982, 183X183 cm :
프레임캔버스 위에 아크릴릭과 유성크레용

피렌체, 1983, 212X390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치아라를 위한 피아노레슨, 1983, 167.5X152.5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과 유성크레용

잿물, 1983, 167.5X152.5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과 유성크레용

즐거움, 1984, 218.5X172.5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과 유성크레용 종이꼴라쥬

큰 탑, 1984, 152.5X122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크레용과 실크스크린

인물3A, 1984, 182X121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크레용

보행자1, 1984, 152.5X122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크레용

기도하는사람, 1984, 172.5X218.5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크레용과 실크스크린

페즈 디스펜서, 1984, 183X122cm :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유성크레용

 

 

 

 

 

 

 

 

검은 피카소 바스키아(Jean Michelle Basquiat).... 삐뚤빼뚤한 낙서가 주는 재미, 그 안에 담긴 비판... 그리고 그 특이한 경력으로 한번 보면 잊지 못할 것 같은 화가, 지미 핸드릭스를 존경했다던 바스키아의 그림들입니다. 아프리카를 연상시키는 one World 음반의 표지도 바스키아 그림이더군요.... 그림의 출처는 http://jmbasquiat.new21.org/main.htm

<

 

<바스키아의 작품들>

<= SAMO, 1987

<= Exhibition announcement, Mucc Club, New York, 1981

<= Untitled(Quality), 1983, Oil paintstick and ink on paper, 49.5x39.4 cm

<= "Beat Bop", Design for record album, 1983

<= "Heaven", 1985 Acrylic and oil on wood panel mounted on wood door(혼합재료)
203x84x8 cm

<= "Black", 1986, Acrylic, oilstick and paper collage on wood, 127x92x22 cm

<= Untitled, 1983

<= Untitled(Red Man), 1981

<= Untitled(detail), 1981

<= Untitled(Sugar Ray Robinson), 1982

<= Untitled(Jackie Robinson), 1982

바스키아 좋아했던 또 다른 흑인, 재키 로빈슨은 메이저 리그 선수로 등록, 흑인장벽을 깨뜨린 인물로 아론이 1952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야구팀의 일원이 될 수 있게 한 선구적 야구선수였다.

<=Untitled(detail), 1986

<= "Hobo Signs", Henry Drefuss Symbol Sourcebook : An authoritative Guied to International Graphic Symbols(New York : McGraw-Hill, 1972)

바스키아는 자신의 시각언어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기호와 상징, 표식의 풍부한 공급원을 찾았다. 헨리 드레퓌스의 은 그래픽 미술가, 건축가, 디자이너와 상징 미술가들이 애용하는 국제적 기호화 상징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에서 바스키아는 거지들의 초기세대라고 할 수 있는 부랑자들(Hobo)이 서로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던 초보적인 기호들을 모아놓은 <호보기호편>을 발견했다. 이리 저리 떠도는 실업자들이 낙서처럼 써서 남긴 기호들은 부랑자들에게 "물건을 받기 좋은 장소 Good Place For A Handout" "이 사람들은 부자임 These People Are Rich"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바스키아는 이 기호체계를 자신의 회화와 드로잉에 이용하였는데 그것은 이 기호들이 주는 시각적인 즐거움과 낙서적인 성격, 그리고 기호가 의미하는 바가 자신의 작품주제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Untitled(collaboration with Andy Warhol) (detail), 1984

바스키아의 작품은 항상 다양한 관심과 에너지로 넘쳐있으며 작품속의 실제적인 내용, 즉, 단어들은 작가 자신에게 중요한 주제를 설명해준다. 특히 그는 권력과 부의 생성과 남용, 자원 동물 농산물의 가치와 이용에 대한 자신의 깊은 관심을 전달해줄 수 있는 단어들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작품 속으로 삽입하였다. 1984년 앤디워홀과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에서 바스키아는 워홀의 Arm & Hammer 상표를 물감으로 지우고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흑인 재즈음악가를 그려넣은 1센트짜리 동전으로 바꾸어놓았다. 바스키아의 관심은 Peso Neto (왕관) Estimated Value (추정가), Tax Free(면세), 100% Registered Trademark(등록상표)와 같은 가치와 진위성의 문제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가장 강하게 호기심을 보인 것은 음식 생산과 그것의 조절, 보급와 이득에 관한 것이었다. 바스키아는 인간의 지상의 동물과 광자원을 점유하고 독점하는 것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고, 지상에 살고 있는 모두가 소유하는 것이 이상적인 이 자원이 왜, 그리고 또 어떻게 해서 인류복지를 희생하여, 권력과 부의 대상이 되었는가에 이의를 제기했다.

<= "Ouality Meats for the Public"(detail), 1982

<= Untitled, 1982 Acrylic and oilstick on blanket mounted on tied wood supports 170x152.5 cm

<= "Dust Heads", 1982 Acrylic and oilstick on canvas 183x213.5 cm

<= "Mecca", 1982 Acrylic and oilstick on canvas mounted on wood supports 178x178 cm

<= "Florence", 1983 Acrylic on canvas, 212x390 cm

<= "Pez Dispenser", 1984 Acrylic and oilstick on canvas 183x122 cm

<= "Warhol and Basquiat:Paintings" Tony Shafrazi Gallery New York, 1985

 

<퍼온글>

페인트, 거리, 낙서, 헤로인, 죽음.... 장 미셸 바스키아의 삶의 코드들이다.

 

거리의 낙서를 예술로 끌어올린 바스키아가 27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짧은 추적들을 보자.

 

젊은 낙오자, 그리고 예술가. 줄리앙 슈나벨(Julien Schnabel) 감독이 장 미셸 바스키아에 대한

 

 전기영화를 만들어 매스컴에서 한창 떠들어대던 것이 작년이었다.

 

영화 속의 바스키아는 마치 갱스터 랩을 하는 불량 흑인 소년 같았다.

 

세상은 불평할 것들로 가득차 있는 오물덩이라고 말하는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하이티 태생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패션 디자인과 스케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모친은 브루클린 미술관이라든가

 

뉴욕현대 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으로 어린 바스키아를 자주 끌고 다녔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바스키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일생을 사로잡은 아름다움의 영속에 대한.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바스키아는

 

 영재들을 위한 ?에서 공부하게 되고, 그곳에서 낙서화가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난다.

 

 마음이 맞는 만큼 의기투합. 이때부터 그 둘은 함께 작업했고, 온 거리를 낙서로, 그림으로 메우기 시작한다.

 

바스키아의 친구들은 집에서 나와 혼자 생활했던 그를 집에 재워주지 않으려 했다.

 

그가 냉장고, 옷장, 상자, 문 등 평면적인 공간만 나타나면 낙서를 하고 그림을 그려댔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머리에서 곡조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의 손에선 그림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길에 노숙하며 환각제 LSD를 복용하며

 

자신의 삶의 무게를 마약으로 해결하려는 의지의 나약함을 보였다. 그는 거리의 화가였다.

 

무엇보다 그를 행복하게 했던 건 사람들이 사는 공간의 외장(外裝)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모두 벽에 적었다.

 

SAMO(Same Old Shit) 낙서와 함께 반(半) 이미지적인 것들, 아프리카 원주민,

 

 그리고 거리의 부랑자 등을 그렸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깊이감이나 상대적인 크기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2차원의 평면에 그려진 광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바스키아가 사랑했던 앤디워홀이 죽은지 일년 후, 그가 나타내고자 했던 삶을 삼키려는

 

욕구와 교훈이 아닌 실현을 원하는 커다란 열망을 세상 속에 남긴 채,

 

바스키아는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우리는 항상 요절한 천재 아티스트에 대해 그가 보여주려 했던 작품세계보다

 

 사적인 면에 이끌린 채, 과장된 시선으로 작품을 대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하지만 한 아티스트의 죽음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가 보여주려 했던 세계로 함께 시선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

 

그의 작품과 일생을 보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길거리의 낙서광에서 팝아트의 천재 자유구상화가로 평가받는 바스키아는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는 비극적인 삶속에서도 생존적 본능이 뚜렷이 나타나는

 

 충격적이고도 충동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기존제도에서의 의식과 감성의 허구를 폭로하고 거부하면서 비인간화를 주도하는

 

일체의 모순을 말없이 그러나 어느 수단보다 강렬하게 웅변한다.

 

오늘날 바스키아의 그림들은 지하철과 거리의 벽을 장식한 지저분한 낙서를 미술의 차원으로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지난 오늘도 새로운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그가 유명해서인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길을 끌게 한다

 

(사실 전시장안에서도 제일 먼저 눈에 띄었으니까) 가장 크게 느낀 것이 있다면

 

 순수함과 자유스러움이다.

 

미술작품 속에서 무언가 찾아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대한 거부감도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재미있었다.

 

색의 대비도 강렬하고 형태도 들쑥날쑥이지만 그렇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부러웠다.

 

그러나 왜 화가들은 그런 자유를 화폭에 옮기면서 자기자신에게선 부자유했을까?

 

삶의 고립에서 죽어간 바스키아는 죽으면서 자유로웠을까?

 

그는 거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죽어갔다.

 

미술가들은 자신의 세계와 생각을 고집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융합되지 못하는 것 같다.

 

 바스키아가 유명해지면서 동시에 잃어버린 사람들,

 

그 외로움을 달래주는 바스키아의 정신적지주인 앤디워홀의 죽음을 바스키아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바스키아에 대해 알아가면서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의 광적인 생각과 집착들, 고립, 예술가들이 지닌 자신만의 세계,

 

그리고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야 마는 삶의 포기까지 말이다.(퍼옴)

 

 

* 위의 글은 10년전 의자료인듯 싶네요.

 

1995년 바스퀴아 사망 10주년 기념행사가 뉴욕을 비롯 활계에서 이루어졌었거든요.

 

저두 그해에 일하던 브랜드 VMD concept thema로 설정 전국매장에서 전시했었거든요.

 

현대작가중 엔디워홀과 함께 대중 속에 예술이라고 볼수있는 장르를

 

개척한 그의 젊은 요절이 아쉽기만 합니다.--

 

블로그 친구 tiffany님을 위해 백 남준 님의 소품을 올립니다.^^

 

액자 상태에서 찍으면 유리빛이 반사되어

 

액자를 해체해서 원본을 스캔 받으려 시도했는데

 

원본이 블랙 하드보드에 이중으로 부착되어 스캔 상태가 좋질않네요^^*

 

 

(미국 갤러리에서 인터넷 경매하고있는 바스퀴어 친필사인)

 

 

 

 

 

 

 

 

 

 

 

 

 

 

 

 

1995년 NY에서 받은 선물 (순수하죠? 크레용으로 사인 하신것 넘 재미있죠?)